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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빅토르 최와 빅토르 안, 한국과 러시아 모두를 품은 두 명의 카레이스키

by 스포토리 2014.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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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최와 빅토르 안은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카레이스키가 되었습니다. 고인이 된 빅토르 최는 여전히 러시아 인들에게 가장 위대한 록커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런 카레이스키 빅토르 최의 이름을 따라 안현수에서 빅토르 안으로 개명을 한 그는 이제 새로운 세대 빅토르의 전설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빅토르라는 이름의 영웅으로 각인되는 두 명의 카레이스키

 

 


카레이스키가 한때 큰 관심을 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카레이스키에 대한 관심도 그 어떤 주목도 받지 못하는 그들은 그저 우리에게는 낯선 존재로 인식될 뿐입니다. 재외국민들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그만큼 크지 않다는 점에서 러시아인이 된 안현수에 대한 관심은 복잡한 듯합니다. 

 

 

두 개의 조국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두 명의 빅토르는 이제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로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음악과 체육으로 러시아라는 거대 제국의 중심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이 두 명의 빅토르는 그래서 더욱 아프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개의 조국이지만 그들이 러시아라는 국가에서 살아야 했던 운명에는 우리의 무관심과 잘못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8년 만에 올림픽에 출전한 안현수 빅토르 안은 다시 한 번 3관왕을 차지하며 러시아가 종합 1위를 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금메달이 3개라는 점에서 안현수 혼자 딴 메달과 같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감은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90년 8월 15일 의문의 교통사고로 숨진 빅토르 최는 소련을 붕괴시키고 러시아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엔지니어였던 고려인 아버지와 교사였던 러시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빅토르 최는 전형적인 카레이스키였습니다. 1974년 레닌그라드의 세로프 예술학교를 다니다 학교를 나온 후 그는 보일러공으로 일을 했습니다.

 

 

예술학교에서는 적응 할 수 없었던 록커인 빅토르에게 그 학교는 수많은 제약만 존재하는 공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보일러공으로 일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록 음악을 하던 그는 1981년 러시아 록 음악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던 보리스 그레벤쉬코프에 의해 발탁되어(우연히 빅토르 최의 연주를 듣게 되어) 당시 레닌그라드의 유일한 합법 록 공연장이었던 레닌그라드 록 클럽에서 공식 데뷰 무대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공식 무대에 선 빅토르 최는 전설의 그룹인 '키노'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레닌그라드 록 클럽 데뷔 후 1982년 전설이 된 앨범 '45'를 발표했습니다. 이 앨범이 전설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앨범에 수록된 '엘렉트리치카(Электричка)' 때문이었습니다. 개인의 삶을 보장하지 않는 전체주의 체제의 부조리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가사는 소련 젊은이들을 열광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항 노래는 결과적으로 빅토르 최를 위협하는 이유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안타깝기도 합니다.


록 음악 자체를 서구의 퇴폐 문화로 인식하던 소련 당국은 '키노'의 이 곡을 공공장소에서 연주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유에 대한 열망이 넘치던 당시 소련 젊은이들에게 이 노래는 하나의 저항시가 되었고, 그렇게 소수민족인 카레이스키 빅토르 최는 소련과 러시아라는 두 거대 제국에 '변혁과 저항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등장과 함께 전설이 되어버린 빅토르 최는 1988년 다섯 번째 앨범인 '혈액형'을 발표하며 진정한 러시아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소련과 아프카니스탄 전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숨진 전쟁 속에서 이 노래는 소련 사회에 염증을 느낀 수많은 지식인과 젊은이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1990년 공식 집계로 62000명이 넘는 관객들이 빅토르 최의 공연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고, 그곳에서는 성화까지 점화된 마지막 공연을 끝으로 다음 앨범을 준비하던 빅토르 최는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빅토르 최를 위해 수만 명의 러시아 시민들이 모여들어 시민장이 되어버린 그의 마지막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해마다 그의 기일에는 유해가 안치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보고슬로프스코예 묘지를 찾고 있습니다.

 

28살 이라는 젊은 나이에 숨진 그는 그렇게 러시아 청년 문화의 진정한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전설이 된 빅토르 최는 다시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올림픽 3연패를 일군 안현수는 다시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 자신을 받아줄 나라를 찾았고, 그를 간절하게 원했던 러시아로 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스케이트를 타고 싶었던 안현수는 빅토르 안이라는 이름으로 소치 올림픽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출전한 모든 경기에서 메달을 따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쇼트트랙을 세계적 수준으로 올려준 이는 빅토르 안이었습니다. 그가 러시아 쇼트트랙 팀원이 되면서 러시아는 새로운 쇼트트랙 강국이 되었고, 그 결과는 소치올림픽에서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3개의 금메달과 하나의 동메달을 새로운 조국인 러시아에 안긴 빅토르 안은 '노력과 성공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편하게 부르기 쉬운 이름인 승리를 뜻하는 '빅토리'의 러시아 명칭과 전설이 된 카레이스키 빅토르 최를 이어가겠다는 안현수는 그렇게 새로운 러시아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러시아 동계올림픽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하나가 된 안현수는 이제는 카레이스키 빅토르 안으로 러시아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1980년대 소련과 러시아 젊은이들의 영웅이 되었던 빅토르 최와 2013년 소치 동계 올림픽을 통해 러시아 국민들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두 명의 카레이스키는 조국인 한국보다는 러시아에서 영원한 전설로 남게 되었습니다. 저항과 성공이라는 서로 다른 가치를 통해 영웅이 된 두 명의 카레이스키 빅토르. 전설이 되어버린 그 위대한 빅토르들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한 두 명의 카레이스키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러시아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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