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공사가 페퍼저축을 상대로 손쉽게 셧아웃 승리를 이끌었다. 지난 경기 도로공사에게 완패를 당한 후 절치부심할 수밖에 없었던 인삼공사는 연패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도로공사와 경기에서 워낙 경기력이 안 좋았기 때문에 걱정이 많았지만, 페퍼저축과 경기를 통해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페퍼저축으로서는 인삼공사를 누르기 어려운 조건들이 너무 많았다. 1라운드에서 첫 승을 신고하기는 했지만, 긴 시즌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없는 많은 어려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선수층이 넓지 않다는 것은 가장 큰 문제다.
1순위로 선택된 박사랑이 고교시절 마지막 대회에서 인대를 다쳐 여전히 훈련조차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2순위로 선택된 박은서의 활약은 박사랑에 대한 아쉬움을 더욱 크게 하고 있다. 페퍼저축은 그동안 리그 경기에 꾸준하게 뛴 선수들이 거의 없다.
외국인 선수인 엘리자벳이 유일하다고 할 정도로 페퍼저축 선수들은 기존 팀들에서 후보도 대기를 하며 시즌을 보낸 선수들이고, 실업팀에서 온 선수들만이 시즌을 치러본 경험이 있지만, 프로와는 다르다. 그런 점에서 시즌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선수들의 체력 부담과 경기 경험이 주는 한계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장황하게 페퍼저축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올 시즌 힘겨운 승부들을 할 수밖에 없는 근원적 이유가 있다는 의미다. 더욱 상위권 팀과 대결에서 페퍼저축의 부족한 부분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도로공사와 경기에서 단 3득점에 그친 이소영은 염혜선 세터와 호흡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만능키인 이소영을 완벽하게 인삼공사를 이끌기 어렵게 만든다. 도로공사에 완패한 후 많은 고민들을 했던 것을 보이고, 그 결과물이 나왔다.
인삼공사는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몰아붙였다. 우려했던 이소영이 첫 득점을 하고 서브 에이스까지 이어지며 페퍼저축 선수들을 힘겹게 했다. 초반부터 상대가 압박하는 경기에서 경험치가 낮은 페퍼저축이 고전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오늘 경기도 힘들겠다는 생각은 1세트 초반 느껴질 정도였다.
아포짓에서 미들 브로커로 전환한 하혜진의 중앙 공격은 좋았다. 블로킹이 뜬 상태에서 각을 틀어 공격하는 노련함은 페퍼저축에서 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하혜진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후배들에게 많은 것들을 전수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하혜진의 활약은 페퍼저축에 중요하고 소중하다.
몸을 날리며 열심히 하지만 기교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흐름을 읽으며 경기를 하는 인삼공사는 여유로웠다. 상대의 빈공간이 어디인지 파악하고 연타로 상대를 혼란스럽게 하는 상황은 페퍼저축의 리시브 불안을 극대화시켰다.
김형실 감독이 반복적으로 연타 공격에 대한 수비를 강조했다. 실제 김 감독은 시즌 전부터 연타에는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자부심까지 드러냈다. 그만큼 연습을 많이했고, 이를 강조해왔다는 의미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 다른 경기들과 달리, 연이어 연타 공격에 무너지는 장면은 페퍼저축이 못했다기보다 인삼공사가 더 노련했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페퍼저축이 리시브 불안으로 힘겨워하는 것과 달리, 인삼공사는 옐레나의 환상적인 리시브와 디그들이 이어지며 전체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여줬다. 외국인 선수에게 바라는 것은 공격력 하나지만, 옐레나는 수준급 수비실력을 갖췄고, 적극적으로 수비를 하고 있다.
박혜민의 연타와 이소영의 중앙 이동 시간차 공격 등이 터지며 14-4까지 점수차를 벌이며 경기는 인삼공사가 지배해갔다. 인삼공사가 완벽한 경기를 한 것과 달리, 페퍼저축은 연결이 매끄럽지 못했다. 리시브부터 불안해지니, 공격으로 연결되는 횟수가 줄어들고 당연해 결정력에서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1세트 25-13이라는 점수차가 보여주듯 인삼공사의 압도적인 경기였다. 2세트는 페퍼저축이 초반 인삼공사를 압박하며 시작했다. 염혜선이 네트 앞에서 토스는 문제가 없었는데 후위에서 전위로 올려주는 토스가 문제를 드러내며 공격 범실들이 반복해 드러났다.
공격수가 공격을 하기 어려운 토스를 올려주면 당연히 공격 성공률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염혜선의 후위 토스는 경기 내내 문제점을 노출했다. 이런 와중에서 페퍼저축의 공격은 터지기 시작했고, 2세트 초반 앞서 나갔지만, 긴 랠리에서 한송이의 중앙 강타는 결정적이었다.
아직 고교 졸업도 하지 않았지만 퍼페저축에서 가능성을 스스로 증명 중인 박은서의 얼굴을 강타한 그 공은 프로의 쓴맛을 보여준 듯했다. 급하게 네트를 넘어 어린 후배에게 미안함을 건네는 한송이의 모습도 참 보기 좋았다.
엘리자벳의 공격을 블로킹으로 옐레나가 막아내며 9-8 역전에 성공한 인삼공사는 한송이의 서브 에이스까지 더해지며 멀어지기 시작했다. 염혜선이 토스가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12-9 상황에서 나온 허슬플레이는 최고였다.
옆 펜스까지 날아간 공을 거둬내 이를 공격 성공으로 만들며 인삼공사는 페퍼저축을 완전히 제압했다. 몸을 사리지 않는 염혜선의 디그 하나가 분위기를 완전히 인삼공사로 가져왔다. 인삼공사 공격이 유기적이고 강한 것은 한송이의 중앙 공격이 막히자 바로 거둬 내고, 이소영이 중앙으로 이동해 공격을 완성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났다.
특정 포지션과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흐름을 읽고 적극적으로 개입해 공격 성공을 만드는 과정은 인삼공사는 가능하지만, 페퍼저축은 아직 힘들다. 경험이 없으니 만들어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 말이다. 이 차이가 결과적으로 인삼공사가 페퍼저축을 압도한 이유이기도 했다.
페퍼저축에서 가장 시원한 공격을 하는 국내 선수는 막내 박은서다. 키는 작지만 좋은 공격수로서 자질을 가졌고, 프로리그에서도 그 가능성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김 감독이 왜 대구여고 3인방을 다 뽑지 않고, 박은서를 2순위로 뽑았는지 스스로 증명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3세트 역시 페퍼저축은 초반 10점대까지는 인삼공사와 대등한 승부를 펼쳤다. 하지만 반복되지만 경험에서 나오는 센스를 아직 페퍼저축은 따라가기 어렵다. 6-5 상황에서 다시 긴 랠리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이소영은 강타가 아니라 뒤쪽 빈자리를 보고 밀어쳤다.
페퍼저축으로서는 이소영의 강 스파이크를 대비하다 허무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뒷 공간을 확인하고 강한 공격보다 빈 곳을 노린 이소영의 센스는 수많은 경기를 통해 얻어진 경험이다. 그런 경험의 차이는 페퍼저축이 올 시즌 내내 절감할 수밖에 없는 벽이다.
3세트 한송이 대신 선발로 나선 정호영은 높이가 주는 장점을 십 분 발휘했다. 인삼공사는 장기적으로 한송이를 대처할 정호영이 빠르게 성장해야 한다. 지난 시즌 아웃사이드 히터에서 미들 브로커로 자리를 옮기며 초반 좋은 모습을 보이다 무릎부상으로 시즌을 완전히 날린 것은 아쉬웠다.
충분한 성장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정호영은 미들 브로커 출신인 이 감독이 애지중지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한송이 역시 손을 꼭 잡고 경기를 함께 보며 상황 대처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후배를 이끄는 모습은 정호영에 대한 기대치를 엿보게 한다.
190cm의 키에 점프력도 좋은 정호영의 중앙 공격은 파괴적이다. 상대 브로킹이 떠도 그 위에서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은 엄청난 장점이다. 오늘 경기에서 정호영의 공격은 각이 쉽게 나오지 않는 공들이 많았다. 높은 타점에서 공격을 했기에 가능한 각이라는 점에서 정호영의 장점은 너무 명확했다.
높이가 장점인 정호영의 그 특징이 보인 장면도 등장했다. 공격만이 아니라 수비 과정에서 블로킹이 실패하는 순간 긴 체공 시간으로 인해 손끝으로 상대 공격을 막아 역공을 하는 과정은 압권이었다. 블로킹을 위해 벽을 세워도 무한대로 공중에 머물 수는 없는 법이다.
옐레나와 함께 블로킹에 나선 상황에서 옐레나의 벽이 먼저 내려오고 자칫 연타 공격으로 블로킹 벽을 넘어 상대 득점이 만들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체공력이 길었던 정호영은 내려오며 손끝으로 역공을 해서 성공시키는 장면은 대단했다.
이선우의 파괴적인 공격에 분노하듯 터진 이소영의 백어택, 그리고 토스의 아쉬움을 날리듯 2단 공격으로 경기를 끝낸 염혜선까지 오늘 경기는 누구 하나가 잘한 것이 아니라 인삼공사는 모든 선수들이 공격수와 수비수가 되어 페퍼저축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렸다.
페퍼저축 김 감독 역시 오늘 경기가 가장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선수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모습은 멋지게 다가왔다. 엘리자벳의 체력 안배와 국내 선수들이 고르게 경기를 뛸 수 있도록 3세트에서는 아예 엘리자벳을 제외시켰다.
이 상황에서 김 감독은 엘리자벳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22살인 엘리자벳에서 훈련을 쉴 수 있도록 배려를 해도 연습에 빠지는 법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헝가리 출신의 그는 주변의 헝가리 음식을 하는 이를 찾아 도시락 배달을 시켜 먹으며 선수들에게 먼저 사실을 알리고 이해를 구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고 했다.
실력만이 아니라 인성까지 갖춘 외국인 선수에 대해 김 감독이 찬사를 보내는 것은 너무 당연해 보인다. 또래들과 경기를 하며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하는 엘리자벳은 경기 내내 선수들을 독려하고 품어주기에 여념이 없다. 페퍼저축이 많은 배구팬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이런 감독과 선수들의 모습에서 나온다.
인삼공사와 페퍼저축의 경기는 승패를 떠나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게 다가왔다. 큰언니인 한송이는 경기 내내 웃으며 후배들을 다독이고 칭찬하는 모습을 보였다. 옐레나가 블로킹 과정에서 손가락을 다치자 누구보다 우려하며 애틋함을 표현하는 큰언니 행동에 옐레나가 당황하고 머쓱해할 정도로 친근감을 보이는 장면은 이 팀이 잘 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준다.
인성이 되지 않는 선수나 팀은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몰락할 수밖에 없다. 승리지상주의를 추구하던 과거와 달리, 국민들은 선수와 팀은 승패보다는 그들의 삶의 태도와 과정을 더욱 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제 막 출발해 1승을 거둔 것이 고작인 페퍼저축은행을 응원하는 전국단위 팬들이 생겨난 것은 승패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응원하기 때문이다. 한국 배구의 미래는 그곳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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