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침묵이었습니다. 골 감각이 완벽하지 않은 것도 있었고, 불운도 존재했다는 점에서 손흥민의 부진은 이내 끝낼 수 있다는 확신도 들었습니다. 뭘 해도 안 되는 상황이거나 연습도 게을리하며 하향세로 접어드는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죠.
올 시즌 토트넘은 많은 기대를 했습니다. 콘테 감독이 원하는 선수 영입을 했고, 초반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죠. 구단에서도 올 시즌 토트넘이 어떤 우승컵이든 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알았기에 짠돌이 레비라는 조롱을 무색하게 영입 자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챔스리그 복귀를 했다는 점에서 선수 영입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렇게 새롭게 영입된 선수들은 아직 분위기에 적응하는 과정처럼 다가왔습니다. 이런 상황에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손흥민의 부진은 영국 현지에서도 화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종차별적인 발언들도 나왔고, 한국인 프리미어리거라는 이유로 온갖 비하적인 발언들을 쉼없이 늘어놓은 영국 언론의 최악이었습니다. 과거부터 악명 높았던 영국 언론의 냄비 근성은 국내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죠.
영국 대표팀 주장인 케인이 부진했을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던 발언들이 나왔다는 점에서 손흥민은 어쩔 수 없이 이들에게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리그 6경기와 챔스 2경기를 치르는 동안 손흥민은 1도움에 그쳤습니다.
득점왕이 다음 시즌 고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너무 긴 침묵이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토트넘은 최근 치른 챔스에서만 패배를 당한 채 무패 행진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영국 언론은 손흥민을 선발에서 빼야 한다는 논지로 밀어붙였고, 콘테 감독은 누구라도 로테이션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로 정리했습니다.
꼴찌로 추락한 레스터시티 전에서 선발에서 제외된 손흥민. 그를 대신한 히샬리송의 모습은 묻혔습니다. 전반을 2-2 동점을 이룰 정도로 토트넘은 상대를 압도하지 못했습니다. 시작과 함께 수비 반칙으로 페널티킥을 내주더니, 2-1로 앞선 상황에서는 메이슨에게 환상 발리킥을 허용하며 동점으로 전반을 마쳤죠.
케인의 환상적인 헤더골과 다이어의 골까지 이어지기는 했지만, 상대를 압도한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만큼 레스터 시티의 저항이 컸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토트넘이 기록만큼 강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했습니다.
후반 시작과 함께 레스터시티 수비형 미드필더 은디디의 어설픈 상황을 놓치지 않은 베탄쿠르가 빼앗아 직접 역전골까지 성공시켰습니다. 역전에 성공하자 콘테 감독은 선수 교체에 나서기 시작했고, 손흥민은 밋밋한 모습을 보인 히샬리송을 대신해 후반 14분 그라운드에 나섰습니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교체로 나선적 없었던 손흥민은 자존심도 상했을 겁니다. 그런 분노와 다짐들은 이내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1점 차이라는 점과 토트넘이 레스터시티를 압도하지 못한 상황에서 후반 28분 베탄쿠르의 패스를 받은 손흥민은 수비수 2명을 앞에 두고 오른발 감아 차기로 환상적인 골을 만들어냈습니다.
긴 골 침묵을 깨트리는 골이자, 불안한 리드를 안전함으로 이끈 추가골이었습니다. 수비수들을 앞두고 골키퍼도 손도 데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휘어져 들어간 골은 손흥민이 어떤 존재인지 다시 확인해줬습니다. 아홉 경기만에 골을 넣은 손흥민은 특유의 달려가 무릎 슬라이딩을 하고 시그니처 포즈를 취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얼어 붙은 듯 그 자리에서 '찰칵' 세리머니를 하는 손흥민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죠. 여기서 더욱 뭉클하게 한 것은 동료들이었습니다. 손흥민이 골을 넣자 너나없이 달려와 축하해주는 모습에서 동료애가 무엇인지 느끼게 했으니 말이죠.
후반 39분에도 비슷한 지점에서 손흥민의 날카로움은 다시 한 번 빛을 발했습니다. 시즌 첫 골이 오른발이었다면 이번에는 왼발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정교한 감아 차기로 양발로 모두 환상적인 궤적을 그리며 골을 넣은 손흥민은 이번에는 조용하라는 제스처를 취했습니다.
그동안 영국 언론이 쏟아낸 수많은 말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고,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행동이기도 했죠. 이번에도 선수들은 열광적으로 손흥민을 축하했습니다. 이후에도 손흥민의 움직임은 활발했고, 완벽하게 살아난 손세이셔날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후반 41분에는 또 다른 손흥민의 장기가 드러났습니다. 양발로 완벽한 감아차기 슛을 쏠 수 있음을 다시 증명한 손흥민은 이번에는 상대 오프사이드 트랩을 뚫어내는 특유의 빠른 역습을 이용한 골이었습니다. VAR 판정까지 가야 할 정도로 쉽지 않은 상황에서 결과는 온사이드였습니다.
교체되어 겨우 13분 만에 3골을 넣은 손흥민은 레전드였습니다. 해트트릭을 기록하고 나서야 특유의 밝은 모습을 되찾은 손흥민은 그제서야 웃었습니다. 손흥민은 프리미어 데뷔 8 시즌 동안 세 번째 기록한 해트트릭이기도 했습니다.
토트넘으로서는 교체 후 해트트릭을 기록한 첫 선수가 되었습니다. 토트넘에서 손흥민이 기록한 수많은 기록 중 하나가 새롭게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도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손흥민이 부진하다며 무한 비난에 집착하던 영국 현지 언론도 태도를 바꿔 그를 찬양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온갖 비난에도 손흥민을 믿고 지지한 이들은 자신들의 말을 직접 증명했다고 자랑하기 바빴죠.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맨유 출신의 퍼디난드였습니다. 골 부진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도 퍼디난드는 손흥민을 걱정할 필요 없다며, 그가 계속 주전으로 나와야 한다고 지지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손흥민의 골 가뭄이 끝나자 자신의 주장을 리트윗 하는 퍼디난드의 모습이 반갑게 다가올 정도였습니다.
전형적인 골잡이가 아님에도 윙어로서 득점왕에 올랐던 손흥민. 유럽인이 아닌 아시안으로 최초 득점왕이었던 손흥민은 단박에 팀내 득점 2위에 올라섰습니다. 케인의 다섯 골에 이어 세 골로 팀 내 2위로 올라선 손흥민의 질주는 이제 시작입니다.
한번 골에 발동이 걸리면 몰아넣는 손흥민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이제 그를 막을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손흥민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토트넘은 레스터시티를 6-2로 제압하고, 승점이 같지만 골득실에 밀려 맨시티에 이어 리그 2위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챔스리그 역시 손흥민이 골 감각을 완벽하게 찾았다는 점에서 지난 2경기와 달리, 새로운 전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드필더 3명을 두고 손케 조합을 가동한 콘테의 전략은 성공했습니다. 모호한 전술과 전략으로 인해 손흥민의 공격 능력이 파괴된 것과 달리, 완벽하게 손흥민의 능력을 되살린 이 전술이 이후에도 어떻게 이어질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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