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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효조 삼성 2군 감독이 7일 오전 7시경 지병으로 치료 중이던 병원에서 별세하셨다고 합니다. 한국 야구 사에 가장 완벽한 교타자로 기록되는 타격의 신 장효조. 그는 너무 일찍 세상과 등을 지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고 그에게 배울 것이 많은 수많은 후배들에게 그는 너무 일찍 세상과 이별을 선택했습니다.
타격의 달인, 그를 아직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방망이를 거꾸로 쥐고 타격을 해도 3할은 친다는 타격의 달인 장효조. 교타자로서 타격이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던 전설은 그렇게 우리들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지병으로 인해 투병 중이라는 사실은 언론을 통해 알 수 있었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그 충격은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어쩌면 모상기가 이렇게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 역시 위대한 스승인 장효조 2군 감독이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모상기 역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 은사에 대한 고마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아갈 수밖에는 없겠지요.
80년대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교타자인 장효조는 1983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습니다. 입단 한 83년과 85, 86, 87년 타격왕을 차지하며 당대 최고의 타자로서 이름을 알렸습니다. 87년에는 정규리그 MVP까지 차지하며 타격의 달인 장효조의 활약을 많은 이들에게 완벽하게 각인시키기도 했습니다.
92년 롯데에서 마지막 선수 생활을 마친 장효조는 2000년 삼성에 코치로 돌아와 2군 투수코치, 스카우터를 거쳐 2009년부터 2010년까지 2군 수석코치로 활약했습니다. 2011년 감독이 바뀌며 장효조 역시 2군 감독으로 승격하며 새로운 야구인생을 사는 듯 했지만 안타깝게도 팬들과 제자들을 뒤로 한 채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헐크라는 별명을 가지고 당대를 풍미했던 현 SK 감독 이만수가 자신을 포함해 삼성에서 최고의 타자 계보를 이어갔던 이승엽, 양준혁도 결코 장효조 선배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고 이야기를 할 정도로 장효조라는 인물은 대한민국 프로 야구사에 가장 위대한 타자 중 하나였습니다.
프로야구 30주년 레전드 시상식에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위대한 타자 장효조. 이제는 팬들이 그를 볼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너무 큰 별이 지고 말았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도 많고 해야만 하는 일도 많은 그가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게 되었다는 것은 개인의 아픔이나 팬들의 아쉬움보다 한국 프로야구 전체를 놓고 봐도 안타깝고 아쉬운 일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살아있는 역사로 각인되었던 타격의 달인 장효조. 이젠 영원한 전설로 모든 이들의 가슴에 새겨질 것입니다. 장효조 선수(2군 감독이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그는 영원한 최고의 선수일겁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타격의 달인, 그를 아직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방망이를 거꾸로 쥐고 타격을 해도 3할은 친다는 타격의 달인 장효조. 교타자로서 타격이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던 전설은 그렇게 우리들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지병으로 인해 투병 중이라는 사실은 언론을 통해 알 수 있었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그 충격은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장효조 2군 감독의 별세 소식을 들으니 2주 전 감독님의 쾌유를 비는 모상기의 인터뷰 기사가 눈에 들어옵니다. 제 2의 이대호로 불리며 올 시즌 1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인 차세대 거포 모상기의 사부곡은 순서가 뒤바뀌니 더욱 애틋하고 슬프게 다가오기만 합니다.
"장효조 감독님이 없었다면 나도 없었다. 감독님께서 많이 편찮으신데 어서 빨리 쾌차하셨으면 좋겠다. 조만간 병원에 찾아가 감사의 인사와 함께 힘내시라는 말을 직접 드리고 싶다"
"감독님께서는 '회초리를 휘두르듯 쳐 보라'고 조언해 주셨다. 딱딱하게 치지 말고 부드럽게 치라는 말씀이었다. 장 감독님은 작은 문제점 하나도 세심하게 짚어주며 이끌어 주셨다. 간혹 무서울 때도 있었지만 감독님의 가르침 덕분에 1군에도 올라오고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장 감독님이 어서 빨리 일어나셔서 성장한 내 모습을 봐주셨으면 좋겠다. '잘했다'는 말을 듣고 싶다"
"감독님께서는 '회초리를 휘두르듯 쳐 보라'고 조언해 주셨다. 딱딱하게 치지 말고 부드럽게 치라는 말씀이었다. 장 감독님은 작은 문제점 하나도 세심하게 짚어주며 이끌어 주셨다. 간혹 무서울 때도 있었지만 감독님의 가르침 덕분에 1군에도 올라오고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장 감독님이 어서 빨리 일어나셔서 성장한 내 모습을 봐주셨으면 좋겠다. '잘했다'는 말을 듣고 싶다"
어쩌면 모상기가 이렇게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 역시 위대한 스승인 장효조 2군 감독이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모상기 역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 은사에 대한 고마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아갈 수밖에는 없겠지요.
80년대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교타자인 장효조는 1983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습니다. 입단 한 83년과 85, 86, 87년 타격왕을 차지하며 당대 최고의 타자로서 이름을 알렸습니다. 87년에는 정규리그 MVP까지 차지하며 타격의 달인 장효조의 활약을 많은 이들에게 완벽하게 각인시키기도 했습니다.
92년 롯데에서 마지막 선수 생활을 마친 장효조는 2000년 삼성에 코치로 돌아와 2군 투수코치, 스카우터를 거쳐 2009년부터 2010년까지 2군 수석코치로 활약했습니다. 2011년 감독이 바뀌며 장효조 역시 2군 감독으로 승격하며 새로운 야구인생을 사는 듯 했지만 안타깝게도 팬들과 제자들을 뒤로 한 채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헐크라는 별명을 가지고 당대를 풍미했던 현 SK 감독 이만수가 자신을 포함해 삼성에서 최고의 타자 계보를 이어갔던 이승엽, 양준혁도 결코 장효조 선배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고 이야기를 할 정도로 장효조라는 인물은 대한민국 프로 야구사에 가장 위대한 타자 중 하나였습니다.
프로야구 30주년 레전드 시상식에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위대한 타자 장효조. 이제는 팬들이 그를 볼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너무 큰 별이 지고 말았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도 많고 해야만 하는 일도 많은 그가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게 되었다는 것은 개인의 아픔이나 팬들의 아쉬움보다 한국 프로야구 전체를 놓고 봐도 안타깝고 아쉬운 일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살아있는 역사로 각인되었던 타격의 달인 장효조. 이젠 영원한 전설로 모든 이들의 가슴에 새겨질 것입니다. 장효조 선수(2군 감독이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그는 영원한 최고의 선수일겁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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