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싱에서 첫 금메달이 나왔던 대한민국은 여자 펜싱에서도 메달을 노려볼만했습니다. 여자 펜싱 사브르에 출전한 최세빈은 초반 극적인 모습들을 연출하며 파죽지세를 선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승 문턱에서 좌절하고 동메달 결정전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최세빈의 상대는 우크라이나의 올하 하를란 이었습니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니아는 이번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실제 전쟁에 참전한 스포츠 스타들이 전사하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었기 때문입니다.
세계 1위까지 꺾으며 파죽지세를 보인 최세빈은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하를란에게 초반 8-3까지 앞서나가며 수월하게 동메달을 획득할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그렇게 놔두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서사를 가진 선수는 그렇게 전설이 되었습니다.
하를란은 이번 파리 올림픽 출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출전 자격에서 실력이 아니라 그가 한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2023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러시아 출신 안나 스미르노바에게 15-7로 승리한 경기가 문제였습니다.
전쟁 중인 상황에서 적국인 러시아 선수를 상대로 승리한 것은 하를란에게는 특별한 가치가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서도 꼭 이기고 싶었을 겁니다. 문제는 경기가 끝난 후 하를란은 스미르노바의 악수를 거부했습니다.
악수를 하려고 다가오는 스미르노바를 칼로 막아선 하를란은 악수 대신 검을 부딪치자는 뜻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스미르노바는 이를 거부하고 피스트에 의자를 놓고 1시간 가까이 항의를 이어갔습니다.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제펜싱연맹 규정은 경기 후 선수들이 악수를 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이를 어기면 실격 처리가 되는데, 하를란은 끝내 이를 거부했습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전쟁의 참화 속에서 위태로운 조국을 위한 하를란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이었습니다.
"오늘 내가 보인 메시지는 우리 선수들이 러시아 선수들과 맞설 수는 있지만 결코 악수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당시 하를란이 러시아 선수와 악수를 거부한 이유를 밝혔습니다. 이 모든 것은 메시지라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적국 선수와 악수를 할 수 없다는 확고함은 조국을 위해 비록 총을 들고 싸울 수는 없지만, 이렇게라도 전 세계에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문제는 악수 거부로 인해 하를란은 파리 올림픽 출전 기회를 상실했습니다. 포인트가 필요하고 이를 충족해야만 출전이 가능한 상태에서 실격은 큰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국제올림픽위원회는 하를란의 상황을 예외로 하며 출전 기회가 부여되었습니다.
출전은 가능해졌지만, 전쟁으로 황폐화된 조국에서는 훈련조차 불가능했습니다. 여전히 전쟁 중인 상황에서 올림픽을 위해 훈련할만한 곳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해외를 돌며 훈련과 대회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4강에서 프랑스의 사라 발저에게 7-15로 진 하를란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한국의 최세빈을 만났습니다. 사실 하를란은 이미 많은 메달을 딴 유명 선수이기도 합니다. 하를란은 2008 베이징올림픽 단체전 금메달, 리우올림픽 단체전 은메달을 딴 선수입니다.
2012 런던올림픽, 2016 리우올림픽에서는 동메달을 딴 하를란은 야나 클로치코바와 함께 우크라이나 역사상 가장 많은 올림픽 메달을 보유한 선수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최세빈 선수로서는 아쉽지만, 전쟁 중인 조국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하를란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우크라이나는 파리올림픽에서 총 26개 종목, 140명이 참가했습니다. 이는 우크라이나 역대 최소 규모라고 합니다. 전쟁 중인 상황에서 100% 준비가 불가한 탓이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은 메시지 전달과 함께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함입니다.
안타깝게도 전쟁중인 상황으로 인해 선수들이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악순환의 연속인 상황에서 하를란은 이번 올림픽에서 우크라이나에 첫 메달을 선사했습니다. 압도적으로 최세빈에게 밀리던 하를란은 반격에 나섰고, 동점이 이어지다 결국 15-14 한 점 차로 역전 승리하며 동메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여자 사브르 개인전에서 금메달이 누군지 모릅니다. 하지만 최소한 동메달을 딴 하를란을 기억할 수는 있었습니다. 극적인 승리를 거둔 후 하를란은 자신의 조국과 국민들을 위해 응원하며, 마스크와 피스트에 입맞춤하는 모습은 압도적이었습니다.
"정말 특별하다. 믿을 수가 없다. 조국을 위한 메달이고, 우크라이나를 지키는 사람들을 위한 메달이다. 여기 오지 못한 선수들, 러시아에 의해 죽은 선수들을 위한 메달. 여기로 온 선수들에게는 참 좋은 출발로 느껴질 거다. 조국이 전쟁 중인 가운데 출전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올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우크라이나를 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행히 러시아에 죽임을 당해 이곳에 올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싸우고 또 경기할 것이다"
하를란은 경기 후 인터뷰를 통해 감격을 다시 전했습니다. 동메달은 조국과 우크라이나를 지키는 사람들을 위한 메달이라 했습니다. 어려운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에 의해 죽은 선수들을 위한 메달이라는 말로 동료를 잃은 아픔이 잘 담겨 있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지독한 고통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올림픽에 출전하고, 전쟁 직후에도 월드컵에 나갔습니다. 세상이 어렵고 힘든데 뭐하러 그런 대회에 나가냐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포츠가 가지는 힘을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스포츠는 그 힘겨움을 이겨내게 하는 동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주의를 부추긴다며 비난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크라이나처럼 전쟁으로 힘든 상황을 생각해 보면 국가를 위한 애국심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를란의 동메달은 금메달보다 값지게 다가옵니다.
상대가 대한민국 선수라는 점이 아쉽게 다가오지만, 서사를 가진 하를란의 극적인 동메달은 스포츠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가치이자 드라마였습니다. 전쟁의 참화를 누구보다 잘 아는 대한민국이라는 점에서 우크라이나 선수의 이 감동적인 드라마는 남일처럼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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